제14회 월명문학상 당선작
먼 나라에서 / 배가브리엘
- 황성의 무인
옛날 옛적 먼 나라에서
많은 왕들과 더 많은 공주들이 살았던 나라에서
파랗게 빛나는 연못 물결 반짝이는 잎사귀
투명한 유리잔이 호화롭게 떠다니던 그늘에서
누구는 명주실을 조으고 누구는 대나무를 다듬고
누구는 그저 머리를 질끈 묶고
지금 나처럼, 지금 나처럼 그저 자주색 옷 하나 걸치고
맨발도 부끄럽잖고 그냥 그늘 아래에서 소매를 털어
세상엔 우리 둘 뿐이야 멀고 먼 나라에서 우리뿐이야
공기도 물도 없어 소리도 없는 곳인데 우리는 여기 있어
우리 발로 사뿐, 발바닥을 눌러 질끈
여린 살결에 사금파리 묻으면 그저 슬쩍 웃을 뿐
금관도 옥대도 없는 우리가 왕과 공주보다 귀해서
흰 발꿈치를 움직여, 그 뒤로 솟아나는 꽃을 봐
수줍게 내민 봉우리에 즐거워
가죽신도 마다않고 먼 나라에서 춤을, 끝나지 않는 춤을 춰
2017 월명문학상 심사평
일단 여섯 분의 작품을 뽑아놓고 며칠 간 묵혀 두면서 고민하기로 하였다.
시간을 두고 읽다 보니 첫인상과는 달리 작품의 높낮이가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분들의 작품은 전체적으로 신라정신을 바탕으로 쓰여진 시들인데, 당선작의 기준은 그 신라정신이 얼마나 곰삭은 상태로 녹아있는가 였다.
그 결과 이 분들 가운데 먼저 세 분의 작품이 떨어져 나갔다.
「저 능청맞게 생긴 오리가」는 어법이 신선하고 가독성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이란 말이 연마다 별 차이 없이 붙어 있어 이를 달리 형상화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계림사를 읽다」는 회화나무, 팽나무. 까치, 낙엽, 왕버들, 다람쥐, 낮달을 모두 숭고한 의미로 끌어당기는 솜씨가 뛰어났으나 결구 처리가 도식적인 느낌이 들었다. 「탑곡에서」는 유머와 재치가 살아넘치는 작품이다. 탑곡에 새겨진 부처와 협시보살, 비천상, 스님, 사자들이 인적이 뜸한 저녁이면 근엄한 모습을 풀고 저마다 일상적인 모습으로 돌아갔다가 이튿날 새벽 다시 바위 속으로 들어간다는 신선한 발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동봉한 두 편의 작품이 앞의 작품을 못 받쳐주고 있어서 아쉬웠다. 세 분 모두 작품마다 편차가 있었다.
「다보탑, 불佛의 향기」외 2편, 「천년의 숲, 천년의 길」외 2편, 「먼 나라에서」외 2편의 작품을 두고 선자들은 오래 고민하였다. 신라정신을 형상화하는 미학적 측면에서 저마다 오래 공들인 내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보탑, 불佛의 향기」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두드러진 특징은 기개가 살아있다는 것이다. 다만 “생사여래生死如來의 틀을/벗어나지 못해도/진산사리의 다보여래가 돋아나고” 등의 표현에서 관념적인 말을 녹여서 썼다면 더 우뚝한 작품이 될 수 있겠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천년의 숲, 천년의 길」외 2편은 언어 다루는 맵시가 좋고, 군데군데 순우리말을 갈무리하는 솜씨도 눈여겨 볼 만 했다. 그러나 전체를 마무리하는 종장에서 강렬성이 두드러지지 못했다. 「먼 나라에서」외 2편은 삼국유사 속의 스토리가 손에 잡힐 듯 오늘의 시점에서 형상화되고 있다는 점이 좋았다.
세 분의 작품은 참으로 우열을 가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오랜 숙고 끝에 우리는 「먼 나라에서」를 당선작으로 하기로 하였다. 이 작품도 아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부제가 없다는 것이다. 독자가 스스로 찾아가는 여지를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부제를 붙이기 바란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이임수
경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손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