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회 산림문화작품 공모전 수상작
[금상] 공원 옆에 산다는 것은 / 조담우
해가 읽고 있는 나무가 두꺼워 보인다
우두커니 열려 있는 낱장에 녹색 글자가 반짝반짝
나무가 해에게 자기를 읽어 주고 있다
느낌과 시각 사이에 착각 비스듬히 삼 층에 내가 있다
해가 내게 시각을 주면 나무가 착각을 녹색 언어로 바꾼다
표의문자를 한글로 받아 쓸 때는 소리 변환을 한다
나무의 목소리가 스것스것 한다
내 귀는 오역한 적이 있긴 하다
물끄러미 서 있는 집중을 눈치 채고 해의 목소리와
따끔따끔한 눈초리까지 들려준다
소리를 본다는 것은 나무가 해를 듣는 것과 같다
나는 귀를 보고 귀는 나무를 듣는다
분명한 제 뜻으로 읽어 주지 않은 건 나무만이 아니다
활짝 열려 있는 원형 광장이 해와 나무를 듣고 있다
스스로 문자가 된 꽃이 광장의 귀를 당기는 느낌과
내가 듣는 음역 가운데 시각과 착각이 엉켜 있다
공원 옆에 산다는 것은 내가 나무를 듣고 있을 때
해가 나를 읽는다는 것
제대로 듣고 싶은 잠자리가 맴돈다
녹색 언어를 가장 잘 이해하는 오후가 광장을 밑줄 긋자
잔디가 촘촘한 귀를 낮추고 시야 끝까지 받아 적는다
꼼꼼히 듣고 있는 내 눈을 나무가 다시 읽는다.
[은상] 한 장의 숲 / 남태현
바람이 숙면에 들어갈 때 숲은 한 폭의 잘 그려진 동양화다
흔들림 없는 나무에서 소리가 빠져나간 새들은 지저귀고
걸음을 세운 사람들 나무에 기대어 그늘을 발라먹고 있다
봄은 아직 여물지 않았는데 여름으로 걸어 들어가는 뒷모습이
드라이플라워처럼 말라 있다
잘 찍어낸 필름 한 통이 비 개인 하늘을 말아놓고
숨바꼭질하는 자작나무 잎에서 뭉개진 안개가 풀어진다
내일까지 물고 온 까치의 날개에서 구부러지는 숲의 배색
햇빛이 뿌려놓은 조각으로 퍼즐을 맞추고
외출하는 아내 닮은 꽃들에게 입맞춤하는 벌 나비
숲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잘 차려진 식탁으로 변신한다
막 샤워를 마친 풀잎들이 옷 벗은 채 체면도 없다
푸른 살갗을 다 드러내 놓고도 저리 당당할 수 있는 나무
숲의 껍질을 발라낼 때마다 시큼한 단물로 맛있게 물든다
나무 사이로 바람이 걸어간 흔적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스스럼 없이 어깨동무하고 있는 풀잎 위에 잠깐 눈 붙이고 간
쪽잠이 풀어지면 몸을 웅크리고 있던 꽃들은 알을 깨고 부화한다
꽃들이 손가락 걸고 향기 풀어놓은 오솔길
사람들 발자국 나이테처럼 흙 속에 새겨 넣는다
나무마다 복사를 하는 그림자가 살을 찌우는
숲은 바람에 젖어도 한 폭 잘 다듬어진 절경은 젖지 않는다.
[장려] 수화 / 홍성남
나무들의 수화를 몸으로 읽고 있다
유리창 너머로 흔들리는 벚꽃이 소리 지를 때
성대의 울림통을 뚫고
혼신을 다해 메시지가 타전된다
함성에 나뭇가지가 기우뚱 중심을 놓치고
차가운 나무에서 보드라운 소리가 떨어진다
가지는 부러져도 나무의 말은 부러지지 않아
거친 껍질까지 환하게 부드러워진다
깊숙이 묻어둔 뿌리의 야심
하지 못했던 부드러운 말도 꺼내 놓는다
나는 가만히 속말로 대답한다
누구에게 전하고 싶어 속내가 굴러가는지
나무의 심장은 단단하게
말의 어깨를 받쳐 주었다
햇살 아래 고개를 갸웃갸웃 흔들며
달콤한 수다가 혈관을 타고 휘어진 가지 끝에서
끝으로 소문이 흘러 숲 속으로 뻗는다
나무 뒤에 응급실이 있다
다급한 소리가 유리창을 두드릴 때
나무의 수화는 그저 그뿐
더는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침묵을 삼키고 응축한 나무 나이테
말을 종일 굶은 나무 입속에 혓바늘이 돋았다
[장려] 밤나무의 추억 / 박명서
-효드림 요양원에서
Ⅰ
요양원에 계신 아버지를 찾아뵈었다.
간병인이 따로 있단 핑계로
한 달여 만에 들른 효드림 요양원
목초향 진동하는 소망실 한쪽 침대에서
아버진 아직 혼곤한 잠을 주무시고 계셨다.
아드님 오셨네요. 어르신 눈떠보셔요.
원장이 아버지의 눈꺼풀을 뒤집으며
침대 크랭크를 돌려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부지 저 왔어요. 저 누구예요?
치매기로 못 알아볼 줄 알면서도
나는 어쩐지 옹색한 인사로
검버섯 핀 아버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간신히 눈을 뜨신 아버지
물기 없는 눈망울을 껌벅이며
닭발같은 손가락으로 내 손을 잡으셨다.
Ⅱ
아부지, 산책시켜 드릴게요.
아내와 겨우 힘을 합해서
아버지를 휠체어에 싣고 마당으로 나갔다.
둥그렇게 둘쳐진 펜스 가운데
내 고향집 뒤란에 서 있는 것과 똑같이 생긴
밑동이 움푹 파인 밤나무가 보였다.
알밤은 이미 다 떨어진 지 오래
빈 쭉정이들만 듬성듬성 매달려 있었다.
아부지, 저 나무 무슨 나문지 아세요?
기억을 더듬게 해드리려고
헤벌어진 밤송이 하나 주워들고 오는 동안
어느새 아버지는 담요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계셨다.
밖에 나오니 좋으세요, 아버님?
아내가 의식이 돌아왔을 때 드려야한다며
요플레를 따 한 점 입에 넣어드렸다.
Ⅲ
문득 아버지의 레파토리가 생각났다.
밤송이 하나에 밤 하나가 꽉 들어차 있어
내가 아들이라 예언했다던 태몽 이야기
서른아홉 늦은 나이에 첫 아들 본 기쁨으로
당신께서 직접 탯줄을 끊으셨다지.
대문이 없어 문지방에 금줄을 달았다가
동네사람 보라고 빨랫대에 높게 매달았다지.
중학교 올라가기 전 해 가을
난파선처럼 기울어 있는 양철지붕 위로
딱 따닥 딱 딱 알밤 떨어질 때
새벽 이부자리 속에서 나눈 대화도 떠올랐다.
아부지, 알밤은 왜 떨어져요?
이젠 컸으니 너 혼자 살아라, 하고 내보내는 거야.
저는 이담에도 아부지랑 살래요.
아버진 날 보고 효자라며 와락 껴안아주셨었지.
Ⅳ
아버지의 무릎밑을 떠난 지 어언 40여 년
나는 늦게서야 비로소 알았노라.
가시 세워 독기 품으며
지붕같은 사랑으로 품어 안은 자식
이제 그만 떨어져 가거라
힘껏 밖으로 떼밀쳐내고는
해산한 몸으로 땅바닥에 나자빠진
푸석해진 밤송이가 바로 아버지였다는 것을.
아버지 춥지 않으세요?
나는 기저귀가 젖었는지 확인하려고
아버지의 아랫도리 속으로 손을 넣었다.
풀잠자리 날개같은 엷은 살갗이 감촉된 순간
갑자기 부끄러움이 밀려와
요양원 들어올 때 한 직원으로부터 받은
주머니 속 ‘장의(葬儀) 대행(代行)’ 전단지를
남 몰래 찢어버리고 말았다.
[장려] 푸른 나무의 유래 / 김민철
도롱이 옷을 입은 땅꾼이
비를 맞으며 바위 위에 앉는다
매미 한 마리가 풀냄새가 나는
땅꾼의 도롱이에 붙어
서글프게 울다가 잠든다
땅꾼은 그 자리를 뜨지 못하고
비가 그치고 매미가 잠에서 깨기 전까지
산제비 한 마리가 진흙을 씹고 와
땅꾼 어깨에 둥지를 트기 시작한다
단꿈을 꾼 것인지 모르겠는데
알이 꿈틀거리는 느낌과
껍질이 단단해지는 소리가
귓속으로 간지럽게 들어온다
어린 새와 매미가
아무것도 모른 채 터를 잡았으니
땅꾼은 이참에
나무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항상 작은 굴만 보는 버릇으로
흙에 뿌리를 내리는 일은 쉬웠고
햇빛을 지도로 사용했으니
하늘을 바라봐도 눈부시지 않는다
우두커니 나무가 된 땅꾼의
가지마다 맺힌 솔방울이
허물을 막 벗으려 온몸을
힘껏 뒤트는 방울뱀의 머리에 떨어지니
혓바닥을 잘못 깨문 방울뱀은
그 자리에서 비옥한 거름이 되었으므로
땅꾼은 환절기에도
전염병을 이겨내는 나무로 컸고
도롱이 옷도 늘 푸른빛을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