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2012. 9. 18. 06:30
728x90

 

 

칠판에 기대어 / 김인육
- 눈오는 날에

 

창 밖을 보아라
어깨동무를 하고
가야할 곳 어디든 두려워 않고
달려가는
저 눈꽃들을 보아라
하나, 둘, 무수히
제 목숨 땅에 눕히어
하얗게 새 지평을 열고 있는
위대한 정신을 보아라
저 무욕의 자세를 보아라
이 땅 어디에서든
죽음이 축조하는 평등의 세계여
죽음으로 더욱 눈부신,

저 눈발같이
희디흰 너희들 영혼도
눈이 되는가
눈이 되어 뛰어가는가
미안하다
스무 살의 들녘에선
나 또한 하얗게 눈이 되고 싶었던 것을
미안하다
꽃이 되지 못하는
언어의 시든 풀씨여
하얗게 백묵가루로 부서져 가는 고독한 나의 정신이여
오늘은
타성으로 부끄러운 교과서를 덮고
저 눈발같이
스무 살 영혼같이
푸드덕푸드덕
나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구나
영혼의 눈 하얗게 뜨고 싶구나

 

- 제1회 교단문예상 가작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