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계명문화상 시부문 당선작
붉은 방 / 이규성
어머니 영전에 소품을 바치며…
용접공 김씨가 자수지 옆 벌목된 나무 둥치 사이에서 동사했을 때, 그의 몸은 휑뎅그렁한 방이었다
발에서 벗어낸 듯한 신발이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고 눈에는 핏발이 녹슨 철사줄처럼 엉켜 있었지만, 무엇이든 함부로 그 몸 밖으로 나올 수 없어 보였다
죽어서도 그의 것인 몸 안에 들어가 그는 죽은 것이다
언제였던가, 용접봉처럼 불꽃으로 녹아 내리며 접붙여 놓았던 아내가 떨어져나가자, 더이상 그의 몸에서 불꽃이 일지 않았다는 풍문이 돌았다 그가 세 들었던 방에는 얼룩진 벽지와 씩씩대는 들소 같은 바람만 남았다고
김씨의 바지주머니에서는 동전 몇 개가 간신히 짤랑거렸다
그의 몸은 이미 휑뎅그렁한 방이었다 방문을 열 수 있는 주문은 가랑거리던 그이 숨소리와 함께 사라졌으니, 그 방은 이제 비밀의 장소가 되어버렸다
몸 속, 단단한 빈방을 열고 나간 김씨의 흔적은 저녁 저수지에서 찾아야 했다 갈대가 하얗게 무릎을 꺾은 저수지 얼음장 위로 그의 외투에서 빠져 나온 솔기 같은 햇살이 붉어질 때, 그의 그림자가 얼음장에 잠시 머물다 가곤 했다
한 계절이 지나서도 가끔 내 뼈 속 빈방에
배롱나무가 꽃을 터트리듯 붉은 등을 내다 거는 그가
[심사평]
이번 심사에서 끝까지 남은 두 편의 작품은 ‘붉은 방’과 ‘주머니에 관한 단상’이었다. 물론 최종적으로 그 두 편을 고르기까지 몇 번 눈길이 멈추었던 작품으로는 ‘빛 속의 거울’과 ‘누이의 집에서’가 있었지만, 작품의 완성도나 시적인 참신함에 있어서 앞의 두 작품에 못 미치는 감이 있었다.
휴가 나온 군인인 화자가 시골 누이의 집을 찾아가 하룻밤을 묵고 온 이야기를 산문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누이의 집에서’는 허술하고 구차한 살림을 살아가는 가족들에 대한 애잔한 사랑이 짙게 풍겨지지만, 또한 그 안쓰러움이 적당한 절제를 통해 길러지지 않은 까닭에 객쩍은 독백으로 풀어지는 느낌을 준다.
매우 극적이고 충격적인 방식으로 악에 받힌 재수생들의 절망적인 삶을 이야기하는 ‘빛 속의 거울’은 어느 리얼리즘 소설의 한 대목보다 섬뜩한 느낌을 준다. 아쉬움이 있다면 그 적나라한 묘사 다음에 어떤 이해나 인식의 갈무리가 따르지 않기에 작품을 쓰다만 듯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또한 동봉한 다른 작품들의 수준도 많이 떨어진다.
끝까지 당선작과 겨루어 오랜 시간 심사자를 고통스럽게 하였던 작품은 ‘주머니의 단상’이었는데, 이 작품과 함께 투고된 ‘옥상 위의 개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섯 편의 연작시 ‘겨울 산책’ 그리고 ‘봄’ ‘어머니’ 등 단시들은 투고자의 타고난 시적 자질을 유감 없이 보여주며, 앞으로 좋은 시인으로서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리라는 예감을 갖게 한다. 다만 그 섬세하고 여린 감수성 때문에 각 편의 작품들의 고만고만하고 큰 충격과 감동이 없다는 점이 아쉽다.
이름 없는 노동자의 차가운 죽음을 다소 요설적인 어조로 풀어 가는 당선작 ‘붉은 방’은 함께 투고된 작품들의 대다수가 명확한 이유 없이 난삽하며 고른 시적 수준을 유지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오래 심사자를 불안케 하였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나타나 보이는 능숙한 묘사한 말솜씨는 학생 투고작품으로서는 가히 탁월한 것이어서 당선작으로 밀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이미 90년대 우리 시에는 이런 류의 작품의 전형을 발견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군데군데 난해한 대목들이 말장난의 혐의를 갖게 한다는 점에서, 수상자의 분발과 정진이 더욱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과연, 트집 잡기는 쉬워도 좋은 시를 쓰기란 어려운 일이다.
이성복(문예창작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