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회 계명문화상 시부문 당선작
불만에 대하여 / 진쌍배(영남대, 국어국문학)
호텔에 가려진 나의 동쪽 방 모서리에
살구꽃 벽지를 타고 우중충하게 곰팡이가 피었다.
나는 가만히 누워서 화가 치밀어 푸른 강물이라 생각했지만
잠시 눈을 감아도
두리번거리다 붕붕대는 버스를 한 번 갈아 타도
나는 여전히 호텔에 가려진 나의 동쪽 방 모서리에 핀
우중충한 곰팡이의 푸른 운동장에 가서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보다가 참다가
하도 기가 막혀서 새로 벽지를 발랐다.
기쁜 얼굴 술에 젖어 남의 집 들뜬 외박을 하고
한 이틀 지루한 사랑사업 안식을 얻을려고
어느날 또 찾아 들어왔더니만
그러나 이번엔 살구꽃 벽지를 타고 얼토당토 아니하게
검은 거미가 와서 제 발이라 줄을 쳐 놓고 쉬고 있는
것이다.
잠시후 내가 씩씩거렸더니
이 거리에서 저거리로 그는 너무도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심사평]
이런 저런 문화상에 응모된 그 많은 시들, 혹은 시 같은 글들을 보면 호머의 서사시 이래로 시경이나 향가 이래로 아직까지 시가 닳아지지 않고 남아있다는 것이 신비스럽다. 그 많은 사람들이 인류 가운데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하나의 인간성이 아직까지 비슷하게 남아 있는 듯 아마도 시란 인류가 있는 한 쓰지 않고는 못배기는 어떤 본능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을 쩔쩔매게 하는 성욕처럼 그것은 긁지 않고는 못견디는, 사람의 근질근질한 성정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본대학이 내게 보낸 응모작들을 넘기면서 들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직은 시가 씌어지고 있다니! 시가 인류 가운데 나타나는 자리가 아직까지 남아 있단 말인가?
이런, 좀 뜽금없는 놀라움이나 의혹이든 것은 지난 80년대에 덧없이 북적거렸던 시의 흥행에 비해 근래 우리 시에 찾아든 정적과 관련되어 있다. 더구나 최근 문학이, 특히 소설이 자본의 빨대에 속절없이 빨려들어 가고 있는 진저리쳐지는 속류 현상속에서 돈도 안되고 명예스럽지도 않은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는 게 나는 고마울 지경이다.
예심을 거쳐 넘어온 응모작들 가운데 네 사람의 시편들이 당선작을 골라야 하는 나를 망설이게 했다. ‘불만에 대하여’ 외 12편을 쓴 사람, ‘냄새와의 대화’ 외 6편을 쓴 사람, ‘신평 입구’외 9편을 쓴 사람, ‘밤바다를 위한 세레나데’외 2편을 쓴 사람이 그들이었다. 이들과 다른 응모자들을 구별시켜 주는 것은 이들은 시를 주장하지 않고 적어도 그것을 의태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행갈이만 해놓고 시라고. 주장하는 뻑뻑한 텍스트에 대한 피로감의 연속 때문에 위 사람의 응모작들이 얼른 눈에 띄었는지도 모르겠다. 바꿔 말하면 이들은 ‘어떤 텍스트를 시적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거나 적어도 어렴풋이 체감하고 있는 사람들이리라. ‘시적인 것’에 대한 어렴풋한 체감, 그것이 중요하다.
숙고끝에 ‘불만에 대하여’를 당선작으로 내민다. 그 이유는 이렇다. 당선작과 그의 다른 시들을 유지시켜주는 시적 수준이 비교적 일정하며, 그래서 그가 앞으로 시를 계속 쓸 수 있으리라는 신뢰감을 준다. 무엇보다도 당선작은 남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이 시를 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느낌은 그가 자신의 삶의 구체성을 시 속으로 끌고 들어오는데서 얻어지는 진정성에 닿아 있다. 살구꽃 벽지에 번진 곰팡이를 보면서 “화가 치밀어 푸른 강물이라 생각” 하는 것: 그는 자신의 일상에서 시가 나타나는 자리를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런 지적을 다른 세 사람은 자신의 작품에 대어보면서 더욱 반발하기 바란다. 또한 누구든 어느날 한 권의 시집을 가지고 나타나 우리를 흥분시켜 주길 바란다. 지금의 ‘감도는 정적’이야말로 실은 이제 좋은 시를 쓸 때라는 걸 뜻하지 않을까?
황지우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