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계명문화상 시부문 당선작
발 / 백민철(중앙대, 문예창작)
발이 아프다. 깨어나면
가족들이 굽은 허리를 펴는 잠
머리맡 유리잔에 심어놓은 양파
잔뿌리들이 허우적거리고
팔십년대에 잘린 나의 발목은 남도땅
담쟁이 넝쿨을 타고 오르다가
만난다. 가족들 몰래 대문을 열고 나서는
오십년대에 잘린 아버지의 서러운 발목을
무성한 갈대,
아버지가 뒤척일 때마다
늑골 사이에서 서걱거리고
갈대뿌리를 적시며 숨죽여 흐르는 강
아- 눈이 부시다
아들아!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반도의 하늘을
보라. 너의 혈관속으로 뜨겁게 흐르는 산맥과 물줄기를
보라. 너의 할아버지가 빼앗긴 조국을 찾아 이 산 저 산
에서 들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풀잎
같은 가슴을 쥐어 뜯는 모습이 보이지 않느냐.
발이 아프다. 깨어나면
어둠 속 양파 잔뿌리들이 어울워
사락사락 자라나는 소리
들먹거리는 아버지의 야윈 어깨
발, 발이 아프다.
[심사평]
이제 이 세상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자와, 이 세상이 뭔가 잘못됐으면, 그것을 어떻게든 옳게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와의 투쟁은, 시에서 후자의 승리로 끝난 것 같으다. 민주화가 왔나는 지배체제 및 개량주의자들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투고시들은 모두 신음하고 있으며, 심지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러나 원래, 이 시대는 행복한가, 불행한 시대에 작가는 행복한가? 하는 질문 또한 지배체제 혹은 개량주의자들이 즐겨쓰는 2분법적 질문인 것이다. 원래, 그리고 갈수록 더욱 불행과 행복은 서로 분리된, 혹은 적대된 개념이 아니다. 불행한 시대에 작가는 행복하거나, 혹은 행복해서는 안되는 것이 아니라, 불행을 역사진보의 창조적 에너지로 만들 때 비로서 시인은 행복하다. 괴로움의 반영은 그 자체로 행복도 불행도 아니며, 구호의 조합은 그 자체로 행복도 불행도 아니다. 서정성의 비극적 광채도 풍자성의 희극적 무기성도 그 불행과 행복의 변증법을 놓치면 「돼지의 행복」에 빠지거나 「불행전염병」의 보균자로 된다. 예술창작에 있어서도 계급이 내용이고, 민족은 형식이다. 민족모순은 계급모순이 드러나는 특수한 형식이며, 분단모순은 민족모순(형식)과 계급모순(내용)이 결합하는 양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성 위에 혹은 그 과학성의 방향으로, 빛을 보아야 한다. 비극적일수록, 구체적일수록 더욱 광채나는 그 낙관성의 빛, 그때 인간의 힘이 온전하게 드러난다. 영웅적이지도 않고 온통 눈물뒤범벅이지만, 다만 슬퍼서가 아니고, 벅차서 다만 누추해서가 아니라 그 누추함에 의미를 부여하고, 마침내 세상을 변혁시킴으로써, 이 세상에 영원한 흔적을 남기고 필멸성을 극복하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에, 흘리는 빛의 눈물 같은 것. 경제적 합법칙성에 의해 규정되지만, 그 사실을 알고 행함으로써 자유에 도달하는 유일한 존재, 물질운동에 자신을 참여시키고 역사적 사명을 완수해야 할 하나의 물질운동에 깃발을 부여할 때, 그것은 종속이 아니라 해방이며, 그때 모든 것은 노래로 바뀔 것이다. 그 노래를 누가 단순히 슬프다고 할 것이며, 누가 단순히 기쁘다고 할 것인가. 당선작 『발』은 그것을 향해 한 고비를 눈앞에 두고 있고(피해자논리․모더니즘의 극복). 가작 『병사일기』는 두 고비를 두고 있다.(가해자논리․피해자논리의 애매성 및 모더니즘 극복→형상화)계명대학교 투고작들의 수준은 평균치보다 높았다.
김정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