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계명문화상 시부문 당선작
행방불명 / 장봉환(경북대, 국어교육학)
그는 어디 갔을까.
복음서 어느 뒷장에도 이름이 없는
물푸레나무 그림자처럼
어두운 사내,
물 속에 고인 하늘을 엿보다가
한 쪽 신발을 빠뜨리고 멀리멀리 달아난 사내,
낯선 도시, 삐걱거리는 이층 여인숙 같은 데서
히죽거리며 걸어 나와서는
어두운 유곽거리, 골목 안을 기웃거리다가,
어제는 난데없이
막노동판 공사장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어느 어두운 위치에서
스스로의 행방을 가늠하고 있을까?
아직도 그 사람들은
질척한 길거리에 생계를 벌려놓고,
그를 기다리고 있는데,
가슴에, 눈동자에 지워지지 않는 죄를 품고
끝없는 인종의 꽃을 피우며 서있는데
그는 왜 애써 우리들의 사랑과 정의를 외면했을까
우리들의 학식과 교양을, 연애와 식탁을 저주하고
우리들의 잠을 방해했을까.
거리의 술꾼과 악당들에 섞이어
우리들의 우상과 신앙을 욕하고 발길질하고
그리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을까.
기울어가는 낮의 어귀
저만큼 비켜 서 있는 석양처럼
그의 눈에 잠시 스쳐간 것은
연민일까 혹은 사랑일까
어둠일까.
Barabba야, Barabba야.
무덤에서 나온 예수는 오늘도
목메인 소리로 그를 부르고 있다는데
그는 어느 어두운 거리에서
스스러이, 지워지지 않는 죄를
닦고 있을까.
물 속에 고인 하늘을 엿보다가
한 쪽 신발을 빠뜨리고 멀리멀리 달아난 사내.
보음서 어느 뒷장에도 이름이 없는
물푸레나무 그림자처럼
어두운 사내.
[심사평]
아까운 작품들이 많았다. 시를 사랑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는 증거이고 그 사랑을 구체화시키는 능력을 젊은이들이 가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선에 들지는 못했지만, 「우리들의 사냥」은 정열적인 작품이다. 생각이나 느낌의 부피도 두텁다. 너무 추상적이고 어조와 표현에 과장이 심한 것이 흠이다. 〈등 뒤에서는 단지 운명적으로 우는 파도 소리/바람은 튼튼한 창(槍)살이 되어〉같은 표현은 맥락이 감동을 준비시켜주지 못하기 때문에 추상과 과장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 자신의 가능성은 많이 보여주고 있다.
「도깨비풀씨」는 훨씬 가라앉은 마음의 자세를 보여준다. 그리고 모르는 사이에 도깨비풀의 공격을 받은 놀라움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도깨비풀씨를 적(敵)으로 삼는 생각의 구조 자체가 이 시를 공감에서 멀어지게 만들며 〈내가 죽어 있었다는 것을 실감한다〉라는 마지막 행을 죽어있는 일상생활의 성찰이라기 보다는 감상적인 발언으로 만든다.
「오후(午後)를 위한 환상(幻想)」과 「너는」은 예쁜 작품들이다. 둘 다 감각이 맑고 밝다.「너는」은〈너는/자꾸 멀어져 가는 배처럼/작아졌다〉같은 어쩌면 상투적인 표현을 신선하게 살리는 맥락을 만드는 솜씨도 보여준다. 그러나 이 시는 뒤로 가면서 추상적이 되면서 약해진다. 「오후(午後)를 위한 환상(幻想) 」은 생각과 느낌의 재미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특히 환상적인 가운데 연을 앞뒤의 현실감각이 감싸는 구조를 만들어 놓은 마음의 상태를 주목할 만하다. 당선작과의 경쟁 때문에 가작이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계속 작품을 쓸 것을 저자에게 권하고 싶다.
당선작 「행방불명(行方不明)은 그 무엇보다도 능숙한 솜씨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같이 동봉된 두 편의 시도 그것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때문에 혹시 기성시인의 시를 잠시 빌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 정도인 것이다.
주 이미지 〈물푸레나무 그림자처럼/어두운 사내〉는 이 시 전체를 물들이고 있는 어둠의 색조와 잘 어울리고, 과장이 없이 침울한 어조도 분위기와 적절히 어울리고 있다. 뿐만 아니라 사용된 형용사와 부사들도 시인의 절제를 받아 힘을 발휘하고 있다.
앞으로 저자가 너무 단색적(單色的)인 상황에만 이끌리지 말고 좀도 넓고 깊게, 그리고 다양하게 세계를 보려고 노력한다면, 기량은 충분히 갖고있는 것으로 믿어지므로, 뛰어난 시인을 하나 갖게 되는 기쁨을 우리는 향유하게 될 것이다.
황동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