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백일장/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제25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장려상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2011. 9. 17.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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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쉼표 / 최분임

- 은행나무모자

 

늘 푸른 아파트 놀이터 은행나무가

중절모 모자를 신고 있다


아이들이 파헤친 은행나무 뿌리 위에

일회용밴드처럼 붙여진 모자

쉼표로 앉아 있다

오랜 노숙의 발바닥처럼

헤지고 갈라졌다

 

시큼한 낯선 냄새를 식솔처럼

달고 다니는 노숙자처럼

아침이면

모자는

낯선 길 하나 달고 있거나

이름 모를 풀씨들을 알처럼

품고 있기도 했다


어둡고 찬 몸뚱이 바닥 위로

희미한 온기의 손바닥 내밀던

신문지 한 장의 기억을

펼치면,

보였다

은행나무가 제 안을 뒤져

폐허 같은 모자의 맨발위로

건네주던

물 묻힌 손수건 몇 장

상처는 그늘이 드나드는

열린문 같았다


반쯤 풀린 눈으로

하루를 어슬렁거리다가

이내 한 조각 박스 위에

오래 걸은 길 부려놓고

쉼표처럼 졸고 있는 시간 위로

놀이터 떠들썩한 하루가

집으로 돌아가자

모자가 은행나무를 벗어

노숙으로 지친 제 몸의

노란 남루를 털고 있다


공터 같은 겨울 지나

모자가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서면

초록 눈의 새싹 하나가

밤새 덮고 있던 우주,

신문지 한 장 빼앗긴

떠돌이 잠처럼 두리번거리며

제 움막을 찾고 있는


 

 

 

쉼표 / 양윤정


오래된 기억 끝에 맺히는

까무룩 잃어버리는

왔던 길 지워져, 돌아갈,

가야할 길 찾지 못하는

그저 타오르며 자라난

지나온 매듭만큼 타오르고 떨어져 내리는

38년 뒤에도 네 등에 기대어 키워온 눈물 쏟을 수 있을까

사막을 건너는 자들의 고여진 달을 네 등에 담뿍 부어줄 수 있을까


달을 삼킨 그 여자 검은 머릴 치렁거리며 따라 나왔네. 치자꽃 하얗게 질려 툭툭 제 몸을 던지는 계절이었네. 내 뒤를 다가오던 그녀, 내 앞을 질러가기 시작 했을 때, 그녀 등에 붙은 저승을 보았네. 거꾸로, 거꾸로 매달려 삶을 뒤돌아 낚은 세월의 빈 자루 왜 저렇게 무겁게 끌고 가는 것인가 그녀에게 물었네. 돌아 본 그녀 눈에 하얀 소금 사막이 가득 펼쳐져 있었네. 그 사막 헤매다 만난 작은 오아시스에 비춘 그 사막 속에 걸어 온 길이 새로 난 길인 줄 알아 돌고 돌아오고 다시 그 길속으로 떠난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길을 가면서, 태양이 뼈를 누이고 달이 옷을 벗은 그 길에 서서 멈추어 서서 알게 되었네.

 

 

 

쉼표 / 김후자


여자가 누웠다

누에처럼 간간히 뒤척이며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모로 누운 여자의 등이 시리다

사막을 횡단하며 지하셋방을 떠돌던

긴 여정의 짐을 풀고

이제 여자가 누웠다


짓무르고 부르튼 몸

늙고 병든 몸에서 꽃물이 터진다

덤불속을 헤매던 몸이 이제사

상처를 들어내는지

붉은 욕창이 화인처럼 박혔다


햇살이 눈부신 오후

또 누군가 지상에서 멀어지는 듯

남은 자들의 오열에

낡은 벽이 가늘게 흔들렸다

병실 밖으론 천지사방 꽃잎이

하르르 날리고

여자도 눈을 감았다


살아생전 꽃구경 소원이라

입버릇처럼 말하더니

산 벚나무 꽃길을 달려가는 듯

영정사진 위에 그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