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지 신인상/시인시각신인상

제2회 시인시각 신인상 당선작(이진)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2011. 8. 13.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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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랄라 정전 / 이진

즐겁게 춤을 추다가 그대로 멈춰라!

정전이에요 티브이가 꺼지고 모니터도 캄캄해지고 조용해진 냉장고, 어둠 속 팽팽해지는 귓바퀴를 타고 전기밥솥 타이머가 공회전하네요 시금치를 팽개친 더듬이손 양초를 찾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던 손가락 손전등을 찾네요

촛불이 자석처럼 가족을 끌어다 앉히네요 촛불두레밥상이 되었네요 연등처럼 피어나는 웃음 밝아서 눈빛 장난기로 반짝이고 풀벌레소리 환하게 안겨오네요 고추불꽃을 사내애가 재빠른 손놀림으로 잘라대고 성냥팔이 계집애 성냥불을 켜대네요 시간의 고봉밥을 마주하자 절로 배부른 아이들 촛농으로 장난을 치네요 양초가 금세 울보가 되고요

전기가 쉽게 들어올 것 같진 않죠?

엄마가 두 손 맞잡아 그림자오리를 그리네요 어이들 토끼를 놀리고요 엄마는 토끼를 오리라 우기고 아이들은 오리를 토끼라고 우기네요 하얀 실크벽지 위로 뒤뚱뒤뚱 깡충깡충 마술벽지 연못이다가도 금방 풀밭으로 변하지요 토끼들이 함부로 풀을 뜯어먹어도 마법에 걸린 풀밭은 상처받는 법이 없지요

시간에 발목 잡힌 엄마가 낙타를 만들어 보이자 순식간에 모래바람 자욱한 실크로드가 펼쳐지네요 수척한 제 그림자를 숨긴 외봉낙타가 사막을 다 건너오기도 전에 꿈의 고봉밥 미리 퍼먹은 아이들 꿈나라에 들고요 아침이면 아이들은 소금심부름을 가게 될지도 모르죠

룰랄라 시간차 여행 중인 타임머신
정지된 밥솥은 타이머를 잊은 지 오래지요

 

 


달팽이관이 불안하다 / 이진

무심코 던지는 말들이 징검다리가 된다
내가 건너갈 수 없는
돌과 돌 사이에서 가라앉는 말들
그 간격이 힘에 부칠 때도 있다
네가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나의 달팽이관을 점령한다
드릴로 귀와 귀 사이에 터널을 뚫는다
소리가 소리를 집어삼켜버려
소리 속에서도 소리를 들을 수 없다
누가 이 소리의 블랙박스를 해독해 주었으면
종일 되새김질로 짓는 말의 감옥
달팽이집을 내려놓기로 작정한다
달팽이관은 지금 청소 중

 

 


수박 / 이진

제왕절개로 태어난 달콤하고 붉은 生

내 무덤을 내가 파고 있다
숟가락으로 파먹어 들어가는 만큼
줄어드는 삶이
등가죽에 금방 들러붙는다

말라버린 탯줄 같은 밥줄
후생까지 반짝거릴 까만 씨눈들만 남긴 채
마침내 바닥이 나고 마는 막장인생
쪽박 깨듯 부수고 싶은 빈 밥통 뒤집어엎어
머리에 쓰면

초록 줄무늬 내 모자
아직은 푸른 무덤

 

 

 


껍질경전 / 이진

태풍에 발목 부러진 소나무 한 그루
생의 끈을 놓지 않고 와불처럼 누워 있다
껍데기는 가라* 누가 그랬던가
제 속살 다 빼앗겨버린 채 껍질만으로
가까스로 땅속 뿌리 한 가닥 잡고 있다

나이테 잃은 소나무 제 나이도 잊고
상처 위에 켜켜이 상처를 쌓아
두툼해진 접목
줄기도 껍질도 아닌 껍질줄기가 되었다

껍데기에 매달린 생의 내력이 저 와불에 새겨져 있다
길게 펼친 껍질경전을
오며 가며 사람들이 읽는다
거친 흘림체로 씌어진 끈질긴 목숨

죽어서 다시 사는 나무

* 신동엽 시인의 시


 

 

냉장고 사내 / 이진

잠들면 떠메고 가도 모르는 집채만한 몸뚱이
그는 한 기의 무덤처럼 덤덤하다
뱃구레만 채워놓으면 세상은 만사형통이다
학교로 유아원으로 아이들을 내보내고 아내도 마트로 출근하면
그때부터 그는 잠의 바다로 출항한다
출렁이는 뱃속은 먹이사슬의 대합실
프로크루테스의 침대처럼 발치에는 발목 잘린 식물성이
머리맡은 머리 잘린 동물성 차지다
삼겹살, 고등어, 꽃게, 닭도리탕, 잡채, 비름나물, 해물탕
한바탕 뜨겁다가 식어버린 것들까지 영역을 다투고
미식가인 사내는 잠 속에서도 연신 입맛을 다신다
날 좀 보소! 휴대폰 소리가 요란하게 꿈의 행성을 폭파하면
철커덕! 유아원 다녀온 사내아이가 아이스크림에 목매고
초등학생 딸이 딸기우유를 꺼내 들고 모니터 속으로 사라진다
아내가 유통기한 지난 먹거리를 다시 채워 넣을 때까지
심장에 빨간 불이 켜지도록 그는 어미 새처럼 제 속을 내어준다
제 목줄을 가족들이 쥐고 잇다는 것을 사내는 안다
드라이아이스처럼 기어 나오는 새벽녘의 울음소리
탯줄 같은 투석기를 등 뒤로 감춘 채
자신의 관 속에서 서서히 부패하는 사내,
쿵! 무너지는 순간까지
그는 결코 등 돌리는 법 없이
오늘도 아침이 그득한 한 집의 식탁을 피워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