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문학상/시흥문학상

제4회 시흥문학상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로 2011. 6. 22.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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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얼굴 / 하백수(대상)

1
티벳으로 한철 여행을 떠난
아내 대신 나는 살림을 한다

아내는 이 도시가 갑자기 납처럼 무겁게 느껴진다고 했다
무료한 오후의 벤치, 표정 없는 가로수
틀에 박힌 상자에 담긴 위선의 꽃바구니들
아내는 아무래도 피부가 다른
이국의 거리가 보고 싶었을 거다

고갯길에 휘날리는 무수한 타르쵸를 보며
손길이 닿지 않는 經典을 새로이 꿈꾸고
비만에 익숙한 생의 한 자락을
바람에 훌훌 날려 버리고 싶었을 거다
만년설에 덮인 경계 없는 히말라야
그곳에 換錢할 수 없는 무욕의 발자국을 남겨
밥하고 빨래하고 설거지만 하던 관습의 시계를
춥고 서늘한 본래의 태엽으로 짱짱하게 감아
게으른 張力을 허공에 날아오르게 하여
생의 내리막길을 숨차게 山頂에 올려놓고,
사람의 마을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항아리 등짐으로 물을 길어 나르는 승려의 고행을
경건한 마음으로 만나고 싶었을 거다

아내의 힘으로 살아가는 온달에게
아내가 없는 빈집이란 폐가 같아서
여기저기 소음과 먼지가 천지로 쌓인다
화초에는 이내 가뭄이 들고 瓷器엔 꽁초의 탑이
밤마다 자리하는 것은 숙면이 아니라
그릴에 굽는 생선의 비릿한 茶毘와 벽에 부딪치는 선잠
끊임없이 오가는 인적의 초인종 소리 뿐

지금쯤 아내는 덜컹대는 버스에서 내려
창포와 유채꽃이 아름다운 티벳 어느 길가에 섰을까
神託을 내려주는 신성한 호수를 쳐다보며
환생을 찾아 떠도는 무색의 바람이 되어
寺院 안쪽 그늘에서 타오르는 버터램프의 불빛을
두 손 모아 간절히 별자리로 바라보고 있을까
아니면 그새 햇빛에 까맣게 그을려
한여름 長席에 널린 검붉은 고추처럼
목이 타는 딱딱한 표정을 하고
함께 동행한 원주민 사내의 야릇한 눈웃음에
도취의 此岸을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야채도 과일도 자라지 않는 황량한 터전에서
오직 보이는 건 하늘과 호수바다, 빙하의 계곡
사나운 바람이 숨을 고르는 오르막 고샅길
그 끝에 자리한 스투파, 첨탑의 그림자에 엎드린 나그네
하늘로 가는 길은 만년설 계단뿐인데

이른 아침 야크가 끄는 수레 위엔
버거운 생의 누더기와 業障이 가득 실려 떠나고
순례자들이 피워 놓은 쥬니퍼 향불 앞에
나이 어린 수도승이 굶주린 영혼을 말리면
눈먼 아버지가 언덕에서 구름소리를 듣는
아 티벳, 그곳에서 나의 모습은 발견할 수 없고
내가 부끄러워해야 할
해맑은 타인의 얼굴만이 눈부시게 마주할 터인데

무를 썰어 넣고
왜간장에 파 마늘을 다져 넣은
기교의 양념을 만들어 고등어 조림을 하고
들기름 발라 김을 굽고
대양의 참치를 묵은 김치에 목욕시켜
청양고추를 송송 빠뜨린 매콤한 찌개를 꿈꾸는
지상의 우리들 생애란 사실 단순한 모자 같은 것
몸에 맞지 않는 겉옷 같은 것
아무 때나 연기에 훅 날려버리고

길에 오른 순례자와 같이
야크가 이끄는 마차나 천막 버스, 가벼운 자전거를 타고
온몸에 파고드는 원시의 햇살에 오체투지한다면
나도 남에게 아름다운 타인이 될 수 있을까
후회 없이 세상을 적시는 한 점 비구름이 될 수 있을까

빈집에 온종일 햇살 모여들고
거친 바람에 휘날리는 정갈한 타르쵸가 보인다
내가 벗긴 육신의 살가죽 높이 나부끼며
바람에 잘도 마른다

2
아내는 어제 빗방울로 카트만두에
도,
착,
했,
다,
고,
서풍에게 전해 왔다


 



운해 / 손일호(금상)

 

쉬어가듯 소리없이 누워있는 골짜기에
하얀 소복의 雲海가 머물고 있다
매정히 흐르는 시끄러운 물소리도
젖은듯 깨어버린 새소리도
그에겐 방해가 되지 안나보다

부끄러운 아낙의 속곳을 감추듯
살포시 고개내민 검디 검은 쪽빛속에
밤새 울어버린 지친 대지의 結晶이
눈물되어 떠 있나보다

답답한 한세상 솜처럼 덮어버라고 싶어서
그렇게 소리없이 떠 있나보다

온열을 느끼는지
하나 둘 옷을 벗는 처녀의 목마름처럼
그도 그렇게 스러짐을 보면서

욕망도
지친 삶도
절절한 사랑도
흔적조차도 과거처럼 용서하며
서편 하늘에 짙게 드리워진 슬픈 그림자에
체념하듯 그렇게 묻어 버리나보다






삶,풍경 / 유택상(은상)

삶의 강줄기를 따라가면
구불구불한 물굽이를 타고 오르내리는
시원한 바람을 만난다
길이 갈라지는 삼각주에서
나의 삶을 따라가는 강줄기들은
나뭇잎 몇개 등에 업고 내려가곤 한다
처음엔 햇살에 등이 붉어지도록
내가 가야 할 풀밭 길을 홀로 걸었다
강둑 아래로는 여치며 쓰르레기의 울음들이
흩어져 떠내려 갔고 나는 커다란 돌무덤 아래서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몇 번을 소용돌이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강둑 위를 맴도는 유년의 불꽃놀이를 보았다
아,마른 풀잎들이 타들어 가며 내는 소리를
소리없는 물줄기가 깊게 흐른다는 것을,
아침 햇빛에 검게 빛나는 강둑의
오랜 세월 동안의 고통을,
나는 삶의 중심과 흐르면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몸에 걸친 것들을 모두 벗어 제치고
치부를 가렸던 나뭇잎마저 치워 버렸을 때,나는 보았다
나의 삶을 따라가는 물줄기들이
밑바닥부터 용솟음치는 것을,






겨울.월곶 / 장재희경(동상)

한때 깊은 바다 밑면 헤아리기 어려웠었지, 버얼건 햇덩이 뭉개
진 수평선 너머로 뚜-욱 지곤 하는데, 오래 전 닻을 내려 뻘 밭 깊
이 고뇌를 묻고 더께로 녹슬고 있는 해묵은 폐선, 등거죽 허옇게
소금끼 말라가고 있다. 감출 것도 드러낼 것도 없이 키 낮은 어깨
에 마음을 기댄 채 목청 높여 걸판지게 부르던 육자배기, 언제부턴
가 가고 오지 않는 썰물, 물에도 길이 있었던 걸 기억하나?
바닷물 가두고 물푸게 힘차게 돌리며, 소금가마 지고 나르던 짜디
짠 기억들 접고 이제 간판도 없이 삭아가는 저 선술집, 처마 끝
햇살만 기웃대고 등 굽은 노인 남루를 꿰차고 앉아, 곰방대 들이키
는 것도 힘겨워 하네, 깊어진 주름마다 저! 세월의 끝 돌아보게 하
네, 저만큼 둥싯 섬하나 떠 있었던 걸 기억하나, 어쩌면 무심한 야산의 끝이었는지도 몰라, 바람이 차다 해풍이랄지 몰아치는 기세 등등한데, 죽음의 빛깔인가?
소금창고 어두운 그림자만 내 앞에 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