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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1 / 유태안

 

 

드라마를 보며 사과를 깎는다. 사각사각 빨간 스토리가 벗겨지며 드라마는 색이 노랗게 변해 버린다. 빨간 표피가 접시 위로 길처럼 흘러내린다. 빨간 표피와 당도의 관계처럼 아내의 웃는 표정 뒤에 행복은 얼마나 될까? 먹기 알맞게 분할되어 접시에 담겨 있는 사과 혹은 아내와 나의 드라마, 아내가 포크에 찍어 내민다. 향기가 풍겨온다 여주인공,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포장된 과거가 푹신한 소파처럼 놓여있는 방안, 사랑하는 남자와의 마지막 관계, 여주인공은 아무 일 없는 듯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리라. 이 뻔하다. 결말을 앞에 놓고 아내는 또 포크를 내게 내민다. 향기는 어디로 갔는가? 반전(反轉) 없는 날들이 15년, 이젠 단련이 되었을 만도 하지만 여주인공의 사연 앞에서 아내는 눈물을 훔친다. 문득, 사과 씨 속에 녹화된 사과나무의 드라마에서 꽃피던 시절 지나간 나비가 향기로 기록된 건 아닐까? 스쳐가는 생각, 한 번의 터치로 한 여자의 역사(歷史)가 넘겨지고 또 과도(果刀)처럼 날을 세우고 누워 드라마 깎기라도 하겠다는 듯 TV 속 남녀의 정사(情死)를 맛본다. 씨방이 텅 비어 가는 아내와 내가

 

 

 

 

은유로 나는 고추잠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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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사람들은 수없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산다. 그 인연의 끈들 중에는 너무 오래돼 낡아서 끊어져 버린 끈도 있고, 벌써 끊어질 수도 있는 끈을 추억에 비끄러매어 잡고 있는 끈도 있다. 놓쳐버리면 삶이 무의미해지는 끈도 있고, 잡고 있을수록 힘을 주는 끈도 있다.내가 시(詩)라는 한 매듭을 달고 산 20년 동안, 거미줄에 걸린 듯 끊어버리고 도망치려 했던 적도 있었고, 시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멀어지는 것만을 안타까워했던 시기도 있었다.때로는 시에 너무 매달려 삶이 무거워졌던 적도 있었다. 그렇게 잡고 온 20년 동안의 시가 겉으로 보기엔 아무 것도 준 것이 없다고 느껴질 때 우울했습니다. 당선 소식을 들은 기쁜 날 아는 형의 시가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요? 이십여 년 동안 써 온 시를 줄줄이 묶어 혹 시집 한 권 내게 되면/ 책을 텔레비전 받침대로 쓰는 친구에게 꼭 줘야겠다./찌개그릇 받침으로 가끔 쓰는 아내에게도 한 권 주고. 갈 길이 멀기만 하다. 하지만 앞으로는 헤쳐 나가야 하는 이 안개 속의 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가고 싶다. 그 길을 언제까지나 함께 가 줄 거라고 믿는 친구 권택삼과 이상문 형, 그리고 끝까지 나를 믿어준 아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에너지를 충전해 주신 이승훈, 이영춘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말의 사다리 오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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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독창적 구조 갖춘 수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온 열다섯 분의 응모작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한영서씨의 ‘나무 위의 아이’ 외 6편과 위나정씨의 ‘오징어’ 외 4편, 그리고 유태안씨의 ‘관계1’ 외 4편이었다. 한영서씨의 작품들은 오랜 습작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나무 위의 아이’는 잃어버린 동심의 세계를 동경하는 순수성과 추상적 이미지를 형상화한 면이 돋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 전체적으로 볼 때 기존의 서정적 틀에 고착되어 있어 독창성이 미흡하여 새롭게 읽히지 않는다. 시적 언어감각과 어휘 선택, 언어 배치에 따르는 문장호응도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위나정씨의 ‘오징어’ 외4편은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한 작품들이었다. ‘오징어’는 선착장의 풍경으로 죽어가는 오징어를 통해 이 시대 삶의 알레고리를 잘 형상화한 작품이다. 긴장감 있는 리듬감각과 상황묘사, 언어구사 능력도 뛰어나다. 그러나 화자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약한 것이 흠결로 남는다. 독창성을 지닌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하다. ‘관계1’ 외 4편을 응모한 유태안씨의 작품은 입체적 구성으로 TV드라마와 나와 그리고 아내와의 관계, 그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이 ‘틈’의 장면을 절묘하게 매치해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이 형상화시킨 수작이다. 독창적인 구조와 시적 언어감각과 시의 생명인 리듬감각까지 고루 갖추고 있어서 당선작으로 미는데 쉽게 의견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평범하고 안일한 소재선택이나 추상적인 시제들은 고려해야 할 요소들로 남는다. 그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앞으로 더 큰 정진을 기대한다.

 

- 심사위원 이승훈(한양대 명예교수) / 이영춘 (한국시인협회 심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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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의 집 / 김정임

 

 

외포리 뻘밭 소라의 집을 보셨나요
굵은 밧줄 한 개씩 기둥처럼 세워서
수 백 개 다닥다닥 붙은 소라의 빈 집들
지금은 선홍빛 노을만 그물질하고 있어요

빈집의 적막이 굴뚝의 연기처럼 피어올라
밀물대신 갯내 나는 뻘밭을 메워가고 있어요
소라의 그물망을 드넓은 바다 어장에 던져두면
호기심 많은 쭈꾸미가 소라의 빈 집으로 스며든다 지요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능소화빛으로 색칠한 대문을 열고
미로같이 꾸불꾸불한 계단을 내려갔을 테지요
발자국 소리가 메아리 되어 울리는
아득하고 속이 깊은 방으로 스며들어
제 꿈을 익히곤 했을 소라의 집

간간이 파도 소리는 열어 둔 창으로 들어 왔다가
꿈의 한 가운데를 현처럼 긋고 나가곤 했겠지요

누군가를 기다리듯 대문 활짝 열어놓은
소라의 빈 집이 나를 자꾸만 끌어 당겨요
제 몸을 던져 꿈을 익혀가던 쭈꾸미처럼,
꿈은 꿈꿀 때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니던가요

 

 

 

 

붉은사슴동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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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빛을 얻은 언어의 새벽

 

오늘은 시가 내 안의 어둠을 말끔히 털어내며 내가 소망하는 경이로운 당선소식을 가지고 왔다. 

갑자기 울컥 목구멍을 타고 치밀어 오르는 한 덩어리의 붉은 슬픔. 

아마 중간 중간 너무 멀게 느껴져 무릎을 꺾으며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고 싶었을 때의,

참담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예고 없이 경쾌하게 날아든 당선소식에 한없이 기쁘고 행복하다. 
내 안에 깊숙이 숨겨진 상처와 어떻게 화해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며 아직 흰 종이에 담아내지

못한 언어들이 탄력을 받게 될 것 같다. 
용기와 힘을 얻었으니 채찍으로 알고 더 열심히 써 나가겠다. 
부족한 글을 택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리며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 
시의 아름다운 문장에 처음 눈뜨게 해 주신 문효치 선생님, 시의 삶을 직접 실천하며 보여주신

박제천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지금 이 시간에도 시를 고민하는 나의 문우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마사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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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진정성으로 정제된 단아한 멋

 

예심을 거쳐 본심으로 올라온 열일곱 분의 응모작 가운데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것은 권혁찬씨의 ‘노트북’ 외4편과 김정임씨의 ‘소라의집’ 외 4편이었다.

권혁찬씨의 작품들은 일정한 문학적 수준을 유지한다. 주제를 형상화하는 능력이 있고 언어의 선택과 배치에 공을 들인 문체에서 만만치 않은 문학적 역량이 느껴진다.

선이 굵고 리듬에도 탄력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산문적으로 읽힌다.

시는 확산의 문법이 아니라 응축의 문법이고 생략의 문법이면서 여백의 문법이다.

언어를 최소화하는 과정 뒤에 남는 광채나는 보석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의 시들이 좀더 정제되고 표현의 광채를 획득하기 바란다.??

김정임씨의 시는 단아하다 절제에서 우러나오는 응축의 힘이 있고 활달한 어조는 아니지만 작품에서 진정성이 느껴진다. 감정의 과장없이 조심스럽게 망설이듯 전개되는 그의 시들은 자연스럽다. 그리고 깊이 각인되는 예리한 이미지들은 그의 시의 독특함이자 매력이다.

당선작 ‘소라의집’에서 확인 되듯이 노련한 장인의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신인에게 요구되는 패기나 대담함 출렁거림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그의 정진을 기대해 본다.


- 심사위원 : 김창균, 이영춘 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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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여인숙 / 김영식


어린물떼새 발자국 안테나처럼 찍힌
해변가 모퉁이 외딴 집 한 채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
「자는 방 잇섬」 걸어놓고 주인은
종일 갯바위 너머 일 갔는지
마당엔 젖은 파도소리만 무성하다
집이 그리운 집게처럼 나는

풍랑주의보 내린 어로漁撈를 정박시키고
소금기 반짝이는 그 집 빈방에 들어
하룻밤 묵고 가기로 한다  

바람소리 켜켜이 비닐장판처럼 깔린
방바닥에 지긋이 손을 넣으면
오래 흘러온 것들이 제 상처를 들여다보는 시간
공중을 내려놓은 갈매기들이
깃 속에 낮의 시린 부리를 묻는다
등 굽은 주인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세상에 없는 주소 꾹꾹 눌러 적으면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방파제 끝에서 인부 몇 돌아오고 나는
옆으로 누워 밤을 견디는 긴발가락집게처럼
온 몸이 녹아드는 아랫목에 누워
홑이불 같은 수평선 한 자락 당겨 덮는다

 

 

 

숟가락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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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해안선 같은 차창으로 어둠이
숭어 떼처럼 참방참방 밀려드는 것을 바라보면서 나는
먼 곳의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겨울 들판 같은 내 안의 나를 만나러가는 길이었을까요.
마을의 불빛들이 따뜻하게 엎드린,
수평선을 닮은 산자락 어디쯤 나도 흘러가 눕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때
해조음인 듯 낯선 음성 하나가 귓바퀴를 파고들었습니다.
잠시, 그리고 오래 목이 메었습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울러 속이 빈 제 시의 항아리에 형형한 눈빛과 생기를 채워
세상 밖으로 출렁이게 해주신
경주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손진은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가족들과 문창반 문우 여러분 그리고 멀고 가까운 곳에서 따순 눈동자로
지켜보아주신 여러분들 모두 고맙습니다.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낮게 걸린 저 불빛이 어둠의 심해를 건너가듯
뚜벅뚜벅 시의 행보를 쉼 없이 내딛는 것으로 보답을 드리겠다는 약속을 심습니다.
밀물에 밀물이 섞여 만조를 이루듯
어둠이 먼저 온 어둠에 살을 섞고
은하를 흘러가던 별 몇 개도 내려와 발목을 담급니다. 별들의 굽은 등뼈가 둥글게 빛납니다. 나는
오래 이 바닷가에 앉아있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문득 했습니다.

 

 




[심사평]

본심에서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김영식의 `소라 여인숙' 외 4편과 박창호의 `오십견'외 4편이었다.

박창호의 시는 일정한 작품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문체가 담백하고 과장된 진술이 없다. 죽음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씌어진 듯한 그의 시들은 죽음이라는 주제를 형상화한다. 상실감과 회한과 생의 덧없음, 차분한 어조는 시의 내용을 실감나게 하면서 독자를 숙연하게 하는 조용한 힘이 된다. 이런 미덕에도 불구하고 감상성은 그의 시의 큰 흠이라고 할 수 있다. “여문 마늘을 먹으면/ 아버지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같은 진술이 그렇다. 감상을 절제할 수 있는 냉정한 가슴, 객관의 자리에서 세계를 응시하는 차가운 눈이 필요하다고 본다.

당선작으로 뽑은 김영식의 `소라 여인숙'은 선이 굵고 힘이 있는 작품이다. 새로운 표현에 대한 열정이 있고 사물들과 자신의 심리에 대한 섬세한 관찰이 돋보인다. “대문 푸른 그 집의 적막을 떠밀자 능소화/ 꽃잎마다 출렁! 노을이 밀려든다”와 “모서리 둥글게 닳은 물결무늬 숙박계” 같은 묘사도 빼어나지만 “누군가의 등을 안아주던 흰 바람벽/ 위로 참방참방 헤엄쳐오는 숭어 떼” 같은 표현은 탁월하면서도 참신한 맛과 멋이 있다. 신인에게는, 그리고 문학에는 독자를 설레게 하고 놀라게 하는 이런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 `소라 여인숙'은 표현에 공을 들이고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언어의 선택과 배치에 무척 신경을 쓴 작품이다. 그러나 함께 응모한 다른 시들은 `소라 여인숙'과 다소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와 썩은 생선들과 고래냄새, 그리고 범죄와 죽음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이 신인의 독특한 시시계를 우리를 주목할 것이다.

- 심사위원 : 김영기·최승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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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스무살의 열차 / 이병철

 

 

너는 차창 위로 그림을 그리다

새벽보다 축축한 잠에 빠졌다

그림자 같이 어둡게 기운 어깨 아래

네 손은 얇은 책장처럼 떨렸고

나는 첫 장을 넘기듯 조심스레

작은 네 손에 뜨거운 지문을 새겼다

 

밤바람 달리는 녹슨 철로는

별빛 스러지는 안개의 통로이자

누군가 밟고 지나간 질척한 눈길

열차는 흐릿한 눈을 뜨고

쓸쓸한 어둠을 향해 주행을 재촉했다

 

무서운 꿈이 가슴을 짓누르는 밤

너는 엷은 숨을 내쉬는 어린아이처럼

내 어깨에 피곤한 머리를 기대고 잠들었다

열차가 기억의 간이역을 지나자

하늘의 뒷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눈을 뜬 아침은 죽음 같은 잠을 깨부숴

어둔 너의 그림 위에 밝은 물감을 덧입혔다

 

열차가 멈춰 서자 우리는

아지랑이 같은 입김을 일으켜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갈색 언덕을 향해 달려갔다

우리의 숨결을 잠재울 계절이 오기 전

벌써 내일의 지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오늘의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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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동양전통은 말에 대해서 가혹하다. 그것은 말의 불완전함을 단정하고 있다. 동양에서의 말의 사건은 이미 종결처리된 사건이다. 그래서 노자는 “말하여질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라고 했다. 불가에서는 아예 말 자체를 버려버린다. 정말 냉정하고 과격한 철학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언어는 상대적인 것만 표현할 뿐 절대적 진리를 담을 수 없다’는 노자의 사상은 도교적 미의식뿐 아니라 동양의 미의식을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말 할 수 없다면 알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우리는 심사하는 과정에서 노자의 미의식과 공자의 미의식 사이에서 고민했다. 말해지지 않음을 극복하는 사유의 깊이와, 말해야 하는 인식의 철저함이 아쉬웠다. 그것은 응모된 작품들이 모두 이러한 한계에서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이다. 메시지가 강한 작품은 사유의 깊이에서 오는 시어의 독특함이 부족했고 시를 잘 만들어내고 있는 작품들은 인식의 철저함에서 오는 성찰이 부족했다. 사유가 생각의 논리적 전개라면 철저한 인식은 사유를 깊고 절실하게 만드는 힘이다. 그런 점에서 박창호씨의 `표류'는 끝까지 논란이 되었던 작품이다. 그러나 시를 만들기에 급급해 내용이 형식을 얻지 못하여 표류하고 있는 게 흠으로 지적되었다. 그 반면에 정경희씨의 작품들은 사유와 인식의 깊이에 있어서 이미 기성시인이었다. 그러나 페이소스 가득한 스냅사진이란 혐의에서 우리는 이 시인을 더 기다리기로 결정했다. 이병철씨의 `여행, 스무살의 열차'는 기성의 어떤 유행에도 물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작품을 주목했다. 상황에 대한 묘사와 통제가 적절히 이루어져 개인적인 삶의 어느 한때를 보편성 있게 설득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그러나 역시 다듬어지지 않은 표현들이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어 크게 아쉬웠다. 시에는 숨김이 없어야 한다. `생각에 삿됨이 없다’는 말은 시는 솔직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 솔직함이란 지금의 자신까지도 부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부정의 불온성이야말로 시를 시대의 가장 예민한 촉수로 만드는 근거이다. 우리는 그 근거를 더 기다리기로 했다.

심사위원 함성호·서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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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 최재영

 

 

길을 나서면 안개가 먼저 다가온다

아무것도 예측할 수 없는 내력

지상의 열린 틈마다 안개가 스며들고

사람들은 한 번쯤 기침을 호소한다

새들은 노래하지 않으며

길은 늘 젖어있다

세상의 새벽은 잠 못 이루는 곳에서 먼저 깨어나

충혈된 소음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밤새 안개에 젖어 퉁퉁 불은 가로등이

불면의 문장처럼 침침하다

정오가 되기까지는 완전한 침묵이다

이곳의 시간은

안개의 흐름에 따라 정해진다

사물들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낼 때쯤이면

정오의 햇살이 길의 한복판까지 나와 있다

지루한 변명들이 길게 꼬리를 남기고 사라진다

내 안에 내가 관여할 수 없는 것들처럼

대부분의 안개는 길 위에서 소멸해 버리고

구부러진 생의 길목마다

어둠은 먼저 찾아드는 법

새들은 모두 어디로 날아갔을까

 

 

 

 

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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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수련과정 거친 솜씨 탁월 

 

시인을 꿈꾸는 사람들은 많다. 이번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응모한 전국 시인 지망생들이 무려 200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이 낸 1,500여 편의 시 작품 중에서 오직 한 편만이 당선작으로 뽑힌다. 그래서 시인을 꿈꾸는 사람은 많지만, 시인이 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새삼 다시 갖는다. 

예선을 거쳐 넘어온 12분의 작품 중 조용숙, 최재영, 심은섭, 이순주 씨의 작품들이 최종적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네 분 다 일정한 수준에 이른 작품을 보여주었지만, 많은 논의 끝에 최재영 씨에게 당선의 영광을 안겨주기로 하였다. 

심사 위원 두 사람이 무엇보다도 관심을 둔 것은 시의 완결성과 참신성이었다. 시의 완결성이란 곧 시의 구조적 통일성을 말하는 것으로, 시는 특히 독자 공감의 의미 구조화가 뒷받침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참신성이란 언어 선택과 언어 조합에서 느껴지는 시적 탄력을 말하는 것으로, 신인으로서의 신선한 언어감각과 문체의 힘이 확인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네 분의 시가 모두 부분부분 구조적 오류와 진부성을 보여주고 있어서 선택이 어려웠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최재영 씨의 작품은 많은 수련 과정을 거친 솜씨가 돋보였고, 시적 완결성과 참신성 면에서도 높은 가능성이 인정되는 것이었다. 축하하며, 치열한 분석적 성찰을 통해 보다 좋은 작품 창작에 노력해 주기를 바란다. 

낙선한 분들이 가진 가능성도 매우 큰 것이었다. 도전 의식도 좋고, 상상력도 남다른 면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부분과 전체를 관계 짓는 안목에 미숙함이 보였다. 스스로가 지닌 시적 결함이 무엇인지 살피는 ‘눈’을 형성하여 새로운 창조적 도전 있기를 기원해마지 않는다. 

 

- 심사위원: 신승근, 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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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의 입 / 신유야 

 

 

이사하기 삼일 전 미리 빈 집을 둘러보았다

물은 잘 나오는지 보일러는 잘 돌아가는지

일행과 나누는 소리가 벽에 퉁겨 되돌아왔다

이사를 하고 살림의 자리를 정해주고 소리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살림들이 소리를 먹고 있었다

집들이 손님의 왁자한 소리를 먹고

소리 몇 개는 아래층으로 흘러 경고를 듣기도 했다

살림들이란 주인의 소리를 삼키며 둥글어지는가

어떤 밤이면 내 말이 맞다며 딱, 무릎 치는 낡은 장롱

어릴 때는 이 소리가 무서워 어머니 가슴팍을 파고 들었는데

언제부턴가 어머니 무릎에서도 이 소리가 났다

어머니 쓰시던 문갑에 등을 대고 잠들면

겨울날 옷 속에서 훅 솟구치는 살내 같은 것이

이마를 가만히 짚어 오기도 하고

살림의 틈서리, 수천의 입으로 삼킨 소리는 어디로 간 것인가

30년 후 내 딸아이의 이마를 짚고 있는 것인가

구들장처럼 식지 않는 몸의 온기

나이기 이전의 생부터 천천히 데워 온

어머니의 장작 같은 손바닥을 찾아간 것인가

새 집에서 쉽게 잠들지 못하고

20년 전의 어머니와 10년 후 딸아이

지금은 세상에 없는 두 사람을 생각한다

잠든 척 가만히 오래 묵은 살림의 그림자

길게 목을 빼고 내 가슴에 귀를 대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당선소감]

 

어둠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빛이 온몸을 휘감아 도는 동안에도 내 안에 웅크리고 앉아 세상을 더듬거리게 했다. 생각의 끝으로 더듬어지는 것들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두려워하고, 뒷걸음쳐 도망치다가도 어둠에 걸려 휘청거리는 일이 배멀미처럼 나에게는 어둠 멀미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멀미도 오래 견디다 보면 이력이 붙는 것일까.

 

어둠 속에서 별이 하나 둘 보이고 그 별빛이 어둠이 슬며시 내미는 손으로 느껴질 때는 더듬거리던 생각의 끝이 환하게 젖어 드니 말이다.

 

아침부터 나물을 다듬고 찌짐을 붙이며 제사음식을 막 마무리 지을 무렵 전화를 받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먼 곳에서 어둠 속을 헤매다니느라 수고했다며 잔치를 벌여주실 생각이셨을까.

 

잘 알지 못하는 어둠을, 어쩌면 영영 잘 알지 못한 채 남게 될지도 모르지만 겁내지 말고 들어가 보라는 격려의 말씀을 오늘 밤에는 하고 가실 것 같다.

 

그리운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하고 고마운 사람들의 손을 꼭 잡고 싶다. 그 사람들에게 된장찌개라도 맛있게 끓여 맛있지? 맛있지? 묻고 또 물으며 그릇 밑바닥이 보일 때까지 서로의 숟가락을 부딪치고 싶다.

 

많이 부족해서 힘이 난다면 우스운 말이 될까. 가슴 가득 힘을 넣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강원도의 눈길에 내 발자국을 꼭꼭 찍어보고 싶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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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어떤 원로시인이 요즘 시인들은 자신에 대하여 분노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듣고 부끄러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해마다 응모 편 수는 늘어도 올 신춘문예 역시 문학적 분발이나 열정 같은 건 찾기 어려웠다.

 

응모작의 특징을 몇 가지로 분류해보면 우선 그 내용에 있어서 격랑하는 세계의 모습이나 당대를 아우를 만한 서정성을 다룬 작품이 드물었다. 공허한 말 잔치나 미시적 내면투시의 현상들은 오늘의 문단의 반영일 것이고, 응모의 형태면으로 볼 때 여러 곳에 투고하기 때문에 작품 수가 모자라 그런지 제일 앞에 놓은 그럴싸한 작품 한 두 편을 빼고는 제대로 된 작품이 없는 응모자가 많았다. 이것들은 이른바 `선수'들이 요행을 바라고 하는 일 일텐데 문학에는 요행이 없다. 종합해보면 응모자들 대부분이 문학을 매우 가볍게 혹은 장난스럽게 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인터넷 글쓰기의 영향일 수도 있다. 어쨌든 시인은 세상 사람들을 대신하여 세상의 기쁨과 슬픔을 노래하라고 붙여준 아주 오래된 이름인데 이 이름을 얻겠다는 이들의 진지함이 아쉬웠다.

 

예선에서 넘어 온 17명 중 마지막까지 남은 건 신유야 조혜경 최선호 강전욱 노미경 다섯 사람이었다. 노미경은 행마다 거리 풍경이 가득한데도 왜 `눈사람'이 무기력하게 읽히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았으면. 강전욱의 시편들은 따뜻하고 능청스럽고 재미있다. 그러나 산문과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최선호의 `희망 한품'은 똑 떨어지게 된 작품이다. 그렇지만 여타의 작품들이 그 점수를 깎아먹고 있다. 기행시들이 지니는 상투성이 문제이긴 하지만 조혜경은 `사북을 지나며'가 특히 좋았다. 마지막으로 신유야의 작품 중, 첫 번째 연의 난삽함만 아니었다면 나는 `겨울로 가는 길'을 당선작으로 뽑고 싶었다. 그러나 새로 이사 갈 집에 먼저 가서 거기서 살다간 사람들과 살아 갈 나의 생과 삶, 그런 속삭임들을 빈방의 반향에서 들어보는 `살림의 입'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거기에 인생이 들어 있어서였다. 모든 응모자들의 정진과 대성을 빈다.

 

- 심사위원 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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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강에서 / 장시우


열리지 않는 섬
꽃망울을 피어 올린 몸짓은 힘겹다
눈뜨지 못할 아침이 찾아와
나무를 흔들어 깨우고
햇귀는 그늘을 지운다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풀꽃은 잠시 흔들렸다
가슴깊이 물이스며
들숨 날숨이 뒤섞인 섬강은
뿌리 속으로 물이 들었다
물떼새 날갯짓 따라 흐른다
눈감으면 발목에 감기는 강물소리
그는 울음을 강바닥에 묻었다
그가 내 손을 잡았을 때
나는 달맞이꽃과 같아서
그에게 가서 입을 맞춘다
풋잠처럼 씨앗처럼.

 

 

 

섬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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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 있었습니다
무작정 그 길을 걸었습니다
한참 걷다 보니 과연 제대로 길을 가고 있는지
어디로 이어지는 길인지
의구심이 생겼습니다
주저앉아 돌아가고 싶은 순간
문득 눈앞에 보이는 이정표 하나,
길 열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처음 길을 물었을 때 가르쳐 주신
양진오, 오봉옥, 이충이 선생님께,
늘 힘이 되어주는 남편과 두 아들 준호, 준형이
그리고 내 편에 서서 함께 길을 걸어준 친구에게
늘 빚쟁이가 되어 살아가는 느낌 지울 수 없습니다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처음 길을 나설 때 신발끈 조여 매는 마음으로
이 길 걷겠습니다
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벙어리 여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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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예심에서 넘어온 12편의 작품 중 진유의 `풍경' 장시우의 `섬강에서' 김린의 `눈이 녹지 않는 집' 김정학의 `가벼워지는 집' 장은선의 `산골 폐교에서'가 마지막으로 남았다.


장은선의 `산골 폐교에서'는 폐교가 간직한 세부를 무리없이 담아냈으며 김정학의 `가벼워지는 집'은 집에 묻어 있는 삶의 얼룩들이 정감있게 형상화되고 있으나 후반부가 소홀했다는 느낌이다.


김린의 `눈이 녹지 않는 집'은 생의 온기가 빠져나간 현실을 밀도있게 다뤘지만 거기에 그치고 말았다는 생각이 든다.


진유의 `풍경'은 한(생각)을 담아내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 그러나 그 부족함이 없다는게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장시우의 `섬강에서'도 문제점이 없는것은 아니나 유연하고 신선하다.


신춘문예가 작품의 완벽성보다는 앞으로의 가능성과 새로운 비젼을 제시한다는 점에 무게를 두는 것이고 보며 기쁜 마음으로 `섬강에서'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심사위원 이상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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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 몸 / 고현수


나무를 자르고 나서 나무의 몸 안을 본다.
나무의 몸속은 티끌도 없이 눈부시다.
뿌리의 하얀 뼈를 세우고
세월의 둥근 집을 새겨온 나무의 몸.
잘려진 나무의 몸속에
싸 한 향기 가득하다.
몸 밖의 비바람을 키우며
몸 안의 그리움을 따라 돌고
돌아온 나무의 세월.
나무는 알았을까
아득히 멀어 끝도 없이 이어진
세상속 길.
잘려진 나무의 둥근 길따라
몸안으로 걸어 들어가면
한줌의 눈물마저 침묵으로
다져 놓은 하얀 빛
나무의 몸안에는
천년의 세월 견디며 켜 놓은
둥그런 등불하나.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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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마음은 항상 아름다움으로 가고자

삶을 아름답게 껴안을 수는 없는걸까.

내가 나를 사랑하는만큼 내 곁의 바람들과 구름들을 사랑할 순 없을까.

혼자서 걸어온 길이 여유롭지만은 않았지만 마음은 항상 아름다움쪽으로 가고자 했다.

뜻밖의 당선소식이 훈훈하다.

먼곳에서 시를 쓰시고 계실 아버지, 곁에서 조용히 지켜봐 주신 엄마에게 고마움을 드린다. 웃음이 선할 형제들, 형수님 계수씨 부산 울산 모두들 내 마음과 같으리라. 항상 발길 가까이 하지 못하는 친구들에게도 소식 전한다.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기쁨한다발 안겨준것이 나의 기쁨이다. 바램이라면 아내의 건강이 조금씩이나마 괜찮아졌으면… 멀리 가 있는 우리 효진이에게도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주었으면 한다. 겨울이다. 모두가 따뜻한 사랑 가슴안에 품었으면 한다.

부족한 글을 올려주신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사이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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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도 의사소통의 한 가지이다. 말하자면 작가로부터 독자에게 주어져 이해되고 공감되는 것이 시의 일차 목표인 것이다. 여기에서 한 편의 시는 상상력의 치밀성과 구조의 완결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의사 소통으로서의 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예심을 거쳐 넘어 온 올해의 시들은 대체로 치열한 시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런 면에서 매우 고무적이기도 하였지만, 불행히도 상상력이 치밀하지 못하고 구조가 완결되지 못해 이해와 공감이 제대로 안 되는 시들이 많았다. 그리고 상상력이 어느 정도 치밀성을 가지고 있고, 구조가 제법 완결성을 얻었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시들이 기존의 시들과 차별화되는 참신성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리하여 선택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고현수, 김정순, 나정호, 오영애, 최숙자 씨 등 다섯 분의 시가 관심을 끌며 최종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최종선에 오른 위의 다섯분의 시는 오랜 수련을 통해 제법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요건들을 모두 충족시키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가운데 고현수씨의 「나무의 몸」은 시적 치열성과 참신성 면에서 남다른 관심을 끄는 것이었다. 결국 고현수씨에게 당선의 영광을 주기로 했지만, 구조의 완결성 면에서 다소 부족함이 지적되는 것이었다. 부디 각고의 노력을 통해 약점을 보완하며 훌륭한 시인이 되기를 바라면서, 비록 당선은 되지 못했지만, 치열한 시정신으로 노력을 기울이는 많은 투고자들에게도 격려를 보내어 아름다운 미래가 있기를 기원해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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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집  / 박대성


정겨운 이웃들이 궁금한 소식들을
보퉁이에 담아 보냅니다.

앞서가는 계절의 깃을 달아 보내기도 하고
지난 계절을 잠 깨워 가기도 합니다.

섶섶에 묻어 온 향긋한 피로와
땀으로 얼룩진 소망의 연흔들
보드랍게 풀려나간 욕망의 실밥들을
맡겨두고 갑니다.

털어내고, 지우고
펴고, 접고
줄이고, 늘이고
이어 붙여야 하는 나른한 소식들이
따갑게 쪼아대는 재봉틀에 붙들려
한 땀 한 땀 다시 일어섭니다.

생살이 미도록 해어진 그리움 하나
누가 이 그리움의 솔기를 미어 놓았을까

튼튼하고 곱다란 사랑 조각 찾아내어
기워줍니다. 

 

 

 

아버지, 액자는 따스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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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는 언어를 매체로 하여 이루어지는 예술의 하나이다. 그러나 예선을 거쳐 넘어온 대부분의 작품들이 상상력이 일상적이고, 언어 구조가 느슨하여 예술적 수준에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박대성씨의 「수선집」과 김정순씨의 「감자꽃」, 조숙향씨의 「낡은 무명자루」는 상상력 면이나 언어구조면에서 어느 정도 일상적 평범성을 뛰어 넘고 있고, 언어 구조도 제법 완결성을 이루어 주목되는 것이었다.

 

김정순씨의 「감자꽃」은 언어를 다루는 솜씨나 상상력의 특이함이 제법 높은 수준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끝 연에서 지금까지의 상상력을 뒷받침해 주는 힘이 갑자기 약화되어 감동을 허물어버리는 구조적 약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시를 하나의 구조라고 할 때, 무엇보다도 끝 부분에서의 완결성이 중요한데 이것이 제대로 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조숙향씨의 「낡은 무명자루」도 마찬가지 지적을 할 수가 있다.

 

앞의 두 사람이 갖고 있는 약점에 비해 박대성씨의 「수선집」은 상상력이나 언어 감각 면에서 상당한 수준의 완결성을 갖는 것이었다. 결국 박대성씨의 「수선집」을 당선작으로 결정하게 되었지만, 이 작품은 특히 「연흔」이라든가 「생살이 미도록」, 또는 「솔기를 미어 놓았을까」와 같은 설익은 표현들이 있어 옥에 티가 되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박대성씨의 여러 작품에서 보이는 시를 향한 도전적 노력이 당선작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도 밝혀 두고자 한다.

 

시인이 되는 일은 시에 대한 프로가 되는 것이다. 그만큼 진지성이 요구되고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박대성씨의 당선을 축하하면서 무한한 노력을 통해 훌륭한 시인으로 대성하기를 기대해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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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출을 벗다 / 장요원


한낮의 외출에서 돌아가는 나무들의 모습이 어둑하다
탄력에서 벗어난 하반신이 의자에 걸쳐 있고
허공 한쪽을 돌리면
촘촘했던 어둠들, 제 몸쪽으로 달라붙는다
의자의 각을 입고 있는 외출
올올이 角의 면을 베꼈을 것이다
이 헐렁한 停留의 한 때와 푹신함이 나는 좋다
실수를 엎질렀던 재킷과
몇 방울 얼룩이 튄 블라우스의 시간을 벗을 수 있는 헐렁한 집


여전히 외출들은 걸려 있거나 접혀져 있다
그러고 보면 문 밖의 세상은
모든 외출로 건축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불빛도 식욕도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도 모두 외출에서 돌아와 있는,
텅 빈 건너편이 조용히 앉아있는 의자
침묵의 소요들이 모두 돌아간
세간들에 달라붙는 귀가한 소음들
왜 집안엔 깨어지기 쉬운 소리들만 있는 것인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저녁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눅눅한 각을 입고 있는 스타킹과
긴 팔을 뻗어 아카시아 이파리를 헹구는 바람의 시간
잠든 몸을 조용히 돌아다니는 숨소리
괄호를 열고 몸을 구부리는 잠이 깊다. 

 

 

 

 

우리는 얼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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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공허한 마음들 포만에 닿길  

 

당선소식이 오던 오후를 눈송이가 촘촘히 메우고 있었습니다.   

 

제가 시를 쓰는 일 또한 허공을 메우는 일입니다.  

 

각을 세워 허공 한 채를 짓고  

 

또 한 채를 짓고 나면 다시 허공이 들어서지요.  

 

제가 건축하는 詩로 인하여 빽빽한 오늘을 살아가는 공허한 마음들이 포만에 닿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가정보다 시를 더 사랑하는 아내를, 엄마를 묵묵히 지켜주는 남편과 아들 딸에게 영광 돌립니다. 늘 힘이 되어준 명린 언니, 정애 언니, 현웅 시인께 감사드리며, 배 아파도 당선됐으면 좋겠다던 친구 황정숙, 서화 시인님, 기홍 시인, 현주 언니, 명희 언니 그리고 시마패, 큐브 님들을 겸연쩍은 마음으로 불러봅니다.  

 

부족한 저를 세워주신 무등일보사와 심사위원 선생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심사평] 시의 새벽을 여는 신생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20년 역사의 신춘무등문예는 가히 전국적인 위상을 구가하는 듯 보였다. 풋풋함의 기척들이 채 가시지 않은 십대들의 투고작에서부터 멀리 해외 이민자에 이르기까지 원고들이 걸어온 주소지는 경향각지에 고루 분포되어 있었다. 천 여편에 이르는 투고작들에게서 아직은 기척같은 시의 유용성을 감지하는 일만으로 선자는 잠시 기꺼워지기로 하였다. 그리고 곧 '한 편의 시'를 찾아나서는 고통의 축제는 시작된다.

순간마다의 갸우뚱거림과 안타까움과 아쉬움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최종적으로 6명의 작품이 남았다. 어쩌면 그렇게 줄여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민달팽이'외 4편을 투고한 정순의 작품에서는 타자들에 비해 튼실한 시적 문장의 안정감이 짚혀졌다. 그러나 문제는 5작품 모두가 동어반복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좀처럼 표정을 바꾸지 않은 시안(詩眼)과 보폭으로 그의 시는 앞을 향해 나아가는 모험을 주저하고 있었다.

'화장터 가는 길'외 3편을 낸 박다영은 표제시의 수준을 다른 작품들이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사막의 오후 세 시는 당신이 가루가 되기 적당한 온도" 등에서 보이는 고투의 언어를 통해 미지의 그의 시의 기미가 짐작됐다.

'거울을 마주한 이상'외 2편의 서경에게서도 지난한 습작기를 거쳐온 노회한 문장들이 읽힌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에게서도 "시의 새벽을 여는 신생의 목소리가 그리웠다"


'발자국에 빠지다'외 3편을 낸 유시은의 시는 한편으로 기성에 가까웠다. 여기 '풀밭'인 경연장에서 그의 시는 자연히 불리했다.

'전어'외 3편을 응모한 김정애와 '바람의 고삐'외 2편을 낸 장요원의 작품이 남겨졌다.

김정애의, '전어'가 올려진 아버지의 밥상은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는 '양철밥상'이다. "젓가락 끝을 맞추려는지" "탕 탕" 양철북 소리를 낸다는 바라봄만으로, 실상(實想)이 시가 되는 지점을 간파한 듯 여겨졌다.

그러나 그의 시 역시 '그늘'을 거느린 완성된 시력에는 다소 미치지 못했음이 아쉬웠다.

세 편의 투고작이 고른 수준에 올라 있는 장요원의 시 '외출을 벗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한다. "오늘의 바깥은 다행히도 한 올의 올도 나가지 않았다" 는 '스타킹'의 환치는 비교적 젊고 튼튼하게 읽혔다. 한 편으로 어딘지 수사와 외피에 조율하는 듯 여겨지는 그의 시업의 미래는, 현재의 바탕 위에서 '깊이'의 모서리를 체득하는 일에 한동안 복무해야할 것으로 비쳐졌다.

당선자의 장도가 보다 원대하고도 높이 있는 영토에 거뜬히 안착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정윤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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